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르 유셴코 (문단 편집) === 대통령 === 이렇게 아슬아슬한 과정을 겪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유셴코는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해도 이를 견제할 수 없던 쿠츠마 시절의 교훈을 활용해[* 유셴코 자신이 쿠치마 정권기에 총리직을 역임하기도 했으니 이러한 한계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했다. 그가 개정한 새로운 우크라이나 헌법은 대통령의 국정운영 권한을 축소시키고 총리에게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으로써 내각을 구성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이원집정부제]]의 요소를 골자로 했다. 이는 대통령에 의한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총리가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다른 성향을 보일 경우 마찰을 일으켜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장점과 단점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은 이후 우크라이나를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고,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다. 당장 유셴코와 정치적 동지 관계였던 티모셴코가 총리에 임명된 이후, 총리의 권한을 이용해 개혁적인 내각을 구성하자 처음에는 친러세력과, 나중에는 친러세력과 친서방세력을 중재하려던 대통령과도 마찰을 일으켰다. 하지만 2014년 유로마이단 당시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했을 때, 우크라이나 정부는 올렉산드르 투르치노우 대통령 대행과 함께 아르세니 야체뉴크 총리를 수반으로 한 내각이 지도력을 발휘, 우크라이나는 정국혼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르게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동부 지역에서는 유셴코의 당선 당시 '''분리독립'''을 언급할 정도로 친러 세력은 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친러 세력 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세력들 역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NATO 가입'''을 요구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급진적으로 서방식으로 개혁하길 원했다. 즉, 한 마디로 두 세력 중 어느 한 곳을 고르자니 나머지 세력과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유셴코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우크라이나군을 이라크에 파병하면서 NATO와 가까워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향하려 하자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반응했고, 우리에게는 [[잠가라 밸브]]로 알려진 천연가스 거래 제한 및 채권 압박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경제에 압박을 주었다. 당연히 유셴코 입장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압력이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티모셴코 현 총리, 모로즈 전 라다 의장을 비롯한 오렌지 혁명 지지세력이 마찰을 빚었고, 이것이 2005년 성장률 급감과 함께 유셴코의 지지율이 빠르게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우크라이나와 티모셴코 블록, 사회당이 따로 후보를 내며 척을 졌고, 2006년 총선에서 우리의 우크라이나는 참패했다. 그래도 친서방 3당([[우리의 우크라이나]],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우크라이나 사회당]])의 의석 수를 합치면 과반에 겨우 턱걸이했다. 그러나 우리의 우크라이나 측에서 고작 33석을 가진 [[우크라이나 사회당]]의 [[올렉산드르 모로즈]]가 최고 라다 의장 직을 가져간 것에 반발함에 따라 사회당이 오렌지 연합에서 이탈해 친서방 과반이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사회당은 이후 [[지역당]], [[우크라이나 공산당]]과 반위기연합을 구성해 친러 과반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율리야 티모셴코]]가 총리 직을 얻는 데 실패하고 유셴코의 정적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결국 유셴코는 의회를 해산하고 2007년 재선거를 치러 친서방 세력이 과반 의석을 가져갔고, 티모셴코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2006년 미군과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진행한 시 브리즈(Sea Breeze) 합동 훈련으로 친러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거기에다가 2004년 12%를 기록하던 경제 성장률이 2005년에 2.4%로 추락했고, 이후 2006년과 2007년에 경제성장률이 회복되었기는 했지만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우크라이나의 1인당 GDP가 2009년에 2500달러로 추락하여 경제 정책 면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리더십은 더더욱 추락했다. 2009년 3월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까지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손을 잡는 등 완전한 반 유셴코로 돌아섰고 정치적 혼란이 심해졌다. 유셴코는 이후 티모셴코를 총리로 임명한 것이 5년 집권 기간 중 가장 큰 실패였다고 연설하며 복수했고, 대통령이 된 야누코비치도 티모센코는 감옥으로 보내면서도 유셴코는 그대로 냅두는 보은(?)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 1월 17일에 치러진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이미 유셴코의 지지율은 10%대 바닥이었기 때문에 단 5% 득표에 그치며 재선에 실패했고, 결국 단임으로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